독서 · 2026년 6월 29일 · 조회 24

인생의 베일

황소연 옮김 / 서머싯 몸

이번에 선정된 『인생의 베일』은 이전에 읽었던 같은 작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처럼 인물들의 심리와 외양을 묘사하는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간결한 서술 덕에 지난달 읽은 『모순』처럼 술술 읽혔고, 첫머리 키티와 찰스의 불륜 장면부터 도파민을 안겨 주는 흡입력이 있었다.

다만 책을 덮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래서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려는 거지?”, “왜 제목이 인생의 베일일까?”였다.

읽는 동안에는 중·고등학생 시절 판타지 소설을 읽듯 빠져들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정작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가 조금 혼란스러웠다.

키티의 성장 소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그 ‘성장’이라는 것이 결국 스스로 불러온 업보의 결과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키티,

  • 유부녀이면서 불륜을 저지른 키티,

  • 남편에게 상처를 입혀가며 찰스를 믿었지만 끝내 뒤통수를 맞은 키티,

  • 잉태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월터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키티 (결국 월터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그녀가 아닌가!),

  • 홍콩에 돌아와서까지 찰스와 다시 몸을 섞고 마는 키티.

그래서 수녀원에서 깨달음을 얻어 눈물 흘리고, 죽어가는 월터에게 용서를 구하는 키티의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뻔뻔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쌓은 업보를 자연과 대지 앞에서 “덧없는 것”이라 되뇌며 용서를 비는 태도가, 어쩐지 너무 손쉬운 면죄처럼 보였달까.

소설 말미에서는 그 모든 책임이 키티의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듯한 인상도 받았다.

물론 해설에서 짚었듯, 여성이 억압받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작품 곳곳에 깔려 있던 것처럼 결국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나 자신에게 솔직할 수만 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성화와 사회적 분위기에 떠밀려 월터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키티는 불륜을 저지를 일도,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찰스의 말처럼, 우리는 사람이기에 어리석은 모습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홍콩에서 겪은 숱한 사건을 통해 키티는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메타인지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메타인지를 얻기 위해 짊어져야 했던 무게는, 애초에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함과 자유가 없었던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끝내 풀리지 않던 ‘왜 인생의 베일인가’라는 의문은 책을 덮고 한참 뒤에야 조금 가닿았다.

원제 ‘The Painted Veil’은 셸리의 시 한 구절 — “산 자들이 삶이라 부르는, 그 색칠된 베일을 들추지 말라” — 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가 ‘삶’이라 믿는 것이 실은 환상으로 덧칠된 얇은 막일지 모른다는 것.

키티가 사랑이라 믿었던 찰스도, 안정이라 믿었던 결혼도, 베일이 걷히고 나서야 민낯을 드러냈다고 본다면 — 결국 이 소설은 그 베일 너머의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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