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2023년 11월 20일 · 조회 6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손에 잡은 이유는 이전에 읽었던 그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나서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름은 정말 많이 들어보았고, 내 주위의 사람들은 대부분 읽어왔던 것 같은데, 정작 그의 소설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이전에 읽었던 에세이에서는 그의 삶의 철학으로부터 본 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했었고,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어 어찌 소설을 안읽을 수 있겠는가.

‘노르웨이의 숲’

배경지식 없이 제목으로부터 들었던 인상은 ‘차가움’, ‘외로움’, '쓸쓸함’이었다.

북유럽의 추운 침엽수림에서 과연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왠지 외로운 감성이 주축을 이루는 일본 감성의 소설이 아닐까?

책을 펼치기 전 나의 감상은 이러했다.

어쨌거나 설렘반, 책의 두께로부터 오는 두려움 반으로 책을 펴게 되었다.

노르웨이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소설로부터 느껴지는 주된 정서는

상실감, 죽음, 이별 등이 떠올랐다.

작중에서 나오는 많은 인물들에게는 '안정감’이란 단어는 어디에서 볼 수 없었고,

모두 자신 혹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루키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책을 덮고나서, 곰곰히 생각해보다보니 아래 문구가 참 와닿았다.

‘죽음은 삶의 대척점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삶의 대척점이라고 생각하는 죽음을 결국 받아들여야하는 것 아닐까?

문장에서는 죽음을 주어로 내세웠지만, 이는 상실과 동치라 생각한다.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인생으로부터 많은 비를 맞듯이, 우리들도 각자 크고 작은 인생의 비를 맞는다.

이 인생의 비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와타나베는 친구의 상실감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거리를 두게되고,

그 와중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랑해주는 여자의 상실감으로 그 극을 달리게 된다.

나도 인생에서 비슷한 경험들이 있어, 와타나베로부터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상실감을 대처하는 와타나베의 모습은 상실감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코와 미도리로부터 마지막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지막 와타나베의 대사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이 대사는 나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순간 해결된다 라는 문장과 일맥상통한 것이 아닐까.

결국 상실감은 삶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이를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전 번안 제목인 '상실의 시대’가 어쩌면 '노르웨이의 숲’보다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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